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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 나의 개발 커리어 요약: 세번째 회사, 외국계 기업에서 사무용 애플리케이션 개발

외국계 기업에서 5년 정도 근무할 때쯤이었다. 당시 스타트업 붐이 일고 있었고, 스마트폰이 열어젖힌 시장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앱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 또한 막연히 꿈꿨던 벤처 회사의 달콤한 장밋빛 상상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일하던 외국계 회사 팀은 성장이 정체된 상태였다. 업무 영역에 변화가 없었고, 변화를 만들 힘도 부족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한 극동지사 개발팀의 한 갈래였는데, 로컬라이제이션 문제를 해결해주는 글로벌 툴 및 라이브러리가 개발되면서 로컬 개발팀의 존재 이유는 사라지는 중이었다. 뛰어난 관리 기술을 바탕으로 직원들을 바쁘게 만드는 데는 능숙했으나, 팀 자체가 노쇠하여 도전 정신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외국계 기업 특성상 그런 직원들이 많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스타트업을 창업한 선배를 만나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스타트업은 스마트 TV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셋톱박스 제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셋톱박스는 고등학교 때 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처음 접한 단어였다. 그때는 아직 인터넷도 보급되지 않았던 때였고, TV는 지붕 위 안테나나 아파트 단지에 공급되는 동축 케이블로 볼 수 있었기에 셋톱박스가 무엇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빌 게이츠는 그 책에서 각 가정에 PC 한 대씩이라는 비전을 이룬 후 다음으로 중요한 시장이 각 가정의 TV를 점령하는 것이라고 내다봤던 것 같다. 그래서 엑스박스 제품을 개발하고 출시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대기업의 이야기이고, 한국의 작은 스타트업, 심지어 투자금마저 넉넉지 않은 우리 스타트업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옮겨간 스타트업 회사는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말 그대로 차고 스타트업(garage start-up)이었다. 주택이 많은 미국 등에서는 흔한 형태였지만, 아파트가 많은 한국에서는 개인 차고가 있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투자사의 사무실 겸 인큐베이팅 공간으로 쓰던 주택 차고에 붙어 있는 창고 공간이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스타트업 지원 센터가 생기기 전이었으니, 이 정도도 아주 좋은 혜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비용을 아끼는 만큼 써야 할 부분에는 확실히 알뜰하게 쓰면서 진행해야 하는 것이 스타트업이다. 하지만 이직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당시 회사에 남은 투자금이 얼마 없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1년을 더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재정 상태에서 왜 나를 스카우트해 온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법도 했으나,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 라이프의 단꿈에 빠져 있던 나로서는 멋진 제품을 만들어 해결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어설펐다는 말이다.

첫 번째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차량 내 DVD 스트리밍 기기였다. 당시만 해도 DVD로 영화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차량 내에 DVD 스트리밍 기기를 설치하고 디스크를 넣으면 스마트폰으로 스트리밍을 쏴서 차량 내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였다. 모 대기업의 개념 증명(PoC)을 외주로 진행하는 건이었다. DVD를 통해 디코딩된 영상을 HLS(HTTP Live Streaming)로 쏴주는 임베디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 되었다. 동작하는 제품 개발까지는 진행되었으나 그다음 단계 개발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다음 프로젝트는 안드로이드 기반 영화 플레이어였다. 애플 TV 형태로 소장하고 있는 영화들을 둘러보고, 선택해서 재생하는 기능이었다. 문제는 이 기기에서 재생될 영화를 어떻게 수급해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작은 스타트업으로서는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데모용 기능으로 웹하드를 통합하는 작업을 하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웹하드를 통한 불법 다운로드가 문제가 많이 되었고, 그로 인해 웹하드에서 불법 다운로드를 근절하고 과금 방식으로 변경하기 위해 제휴된 영화 파일을 검색에 노출시켜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해놓고 있었다. 구현하려 했던 기능은 특정 웹하드 계정 연동을 해두면, 기기에서 구매한 영화의 다운로드를 진행한 후 TV를 통해 관람하는 기능이었다.

그 외에도 몇몇 프로젝트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근무하며 블로그에 기록들을 남기기도 했으나, 지금 보니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런 아이디어조차도 너무 소중하여 블로그에 공개했다가 일을 망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팀은 영업 1인(대표)에 엔지니어 4~5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엔지니어 위주의 빠른 개발 속도를 강점으로 하는 팀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창업 스타일이었는데, 개발 이외의 작업은 외주로 해결하고 특급 개발자들만 모아서 제품 개발 속도를 최대한 빠르게 끌어올리는 방식이었다. 여기에는 여러 장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회사가 폐업하더라도 엔지니어로만 구성된 팀은 다른 곳에서 언제든 인수 후 고용(acqhire)하기 쉽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엑싯 플랜(exit plan)에서 안전장치를 만들고 진행하는 셈이다. 하지만 달의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있는 법이다. 이 접근법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 팀에는 맞지 않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은 PoC를 하고자 하는 목적은 달성했으나 그 후 제품 개발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회사 운영 자금은 거의 바닥나 있는 상태였다. 이미 개발 완료한 제품들이 있으니, 외주 용역이라도 해서 시간을 벌어보자는 의견들이 있었으나, 어떤 이유로 인해 외주 용역은 진행하지 않았고, 폐업의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금 와서 이때를 돌이켜보면, 몇 가지 패인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엔지니어로만 팀을 구성한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앱 기반의 창업에는 효과적인 접근이지만, 하드웨어 제품의 경우에는 엔지니어들만으로는 사업의 활로를 뚫기에는 역부족이다. 양산을 위한 부품 수급 문제부터 완성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영업력이 하드웨어 사업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참고한 접근법은 이 영역에서는 통하지 않는 문제였다. 두 번째는 외주 용역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점이었다. 나 자신도 해당하지만, 임베디드 개발을 해보지 않은 개발자가 해당 영역에서 어느 정도 숙달이 되려면 전적으로 시간과 시행착오를 거쳐볼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이 비용을 해결하기에 외주 용역은 아주 적절한 선택지였으나 택하지 않았다.

스타트업이 망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지금 크게 생각나는 건 이 두 가지 정도이다. 나는 이직하고 그다음 해 12월에 퇴사하게 되었고, 나머지 분들은 그대로 팀을 유지하다가 급성장하던 다른 스타트업에 팀 전체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에서 나 스스로도 깨달은 게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깨달음 중 하나는 그 전 회사에서 배우고 익혀 내 것이 되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 회사의 인프라 위에서만 구현 가능한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개발 방법론이나 소프트웨어 공학 측면에서 시도할 수 있었던 것들의 상당수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인프라가 넉넉한 대기업이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매일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스타트업에서는 사치에 가까운 것들이 많았다.

이 시기를 통해 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뼈저리게 느꼈다. 스타트업의 역동성과 새로운 기술에 대한 갈망은 여전했지만, 사업의 본질과 생존 전략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시장성, 자금 확보, 그리고 사업 운영의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얻은 시간이었다. 이는 이후 나의 개발 커리어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다음 스텝을 고민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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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 Sung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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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eloper + Entrepreneur = Entrevelo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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