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길가에 난 한 포기 풀처럼 그냥 사는 것 법륜스님
우리는 흔히 왜 사느냐고 인생의 의미를 묻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를 갖고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거예요. 삶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러면 또 하나의 굴레만 늘어나게 됩니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다, 인생은 특별해야 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자신의 하루하루 삶에 만족하지 못해서 늘 초조하고 불안하고 후회하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은 저 길에 피어 있는 한 포기 풀꽃과 같습니다. 길가의 풀처럼 그냥 살면 됩니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닌 줄을 알면 인생에서 괴로운 문제의 대부분이 사라져 버립니다.
다만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괴롭고 화나고 짜증나는 불행한 인생이 있고 즐겁고 가볍고 행복한 인생이 있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하루 세 끼 밥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나가서 일할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세요. 눈으로 온갖 색깔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귀가 있어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내 이로 음식을 씹어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세요. 또 두 손이 있어서 내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고 아직 두 다리가 멀쩡해서 산에 오를 수 있는 것에 감사하세요.
이런 감사의 마음을 내면 내 인생이 행복하고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됩니다.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알면 특별한 존재가 되고 특별한 존재라고 잘못 알고 있으면 어리석은 중생이 되는 거예요. 하루 세 끼 먹는 것에 만족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데 하루 세 끼 먹는 것 말고 뭔가 특별한 걸 요구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중생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 사는가?’ 하고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물으세요. 사는 것은 그냥 사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살 수 있으니까요.
만약 내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좋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 자유롭고 행복해지느냐를 생각하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느냐고 물으면 통상적으로 우리들은
첫째 돈이 많아야 한다, 둘째 지위가 높아야 한다, 셋째 명예나 인기가 있어야 한다는 식이에요. 그러나 행복은 돈과 지위와 인기에 있지 않습니다. 옛날 사람들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더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더 잘살고 있는데도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정치인, 관료들을 만나보면 이런 분들이 더 속박을 받고 괴로워합니다. 인기 있는 탤런트나 배우들도 외롭고 살기 힘들다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가난하고 지위가 없으면 행복하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은 하루에 밥을 한 끼밖에 못 먹고 옷도 다 떨어진 것을 입고 가난하게 삽니다. 이 사람들 중에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돈이 있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에요.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면 괴로워지고 어떻게 쓰면 행복해지는가? 어떻게 쓰면 속박을 받고 어떻게 쓰면 자유로워지는가?’ 하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라고 했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62억 인구 중에 50억이 넘는 인구는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서 사는 게 꿈입니다. 거기 가서 살 수만 있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아메리칸 드림’을 꿉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미국이나 캐나다에 살고 있으면서 행복하지 않다면 다른 어디를 간다고 해도 행복해지지 않아요. 즉 천국에 간다고 해도 행복해지지 않아요.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할 때, 당장 죽겠다고 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천국에 가서 괴로울지 즐거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음식이 필요하고, 입을 것이 없는 사람에겐 옷이 필요해요. 그런데 최소한 하루에 한 끼라도 먹을 수 있고 몸을 가릴 수 있는 한 벌의 옷이 있는데도 온갖 불평으로 괴로운 사람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저 길 옆에 피어 있는 한 포기 풀꽃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인생이 그대로 자유로워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나와서 노래 한 곡 해 보세요.”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하기보다는 “저 노래 못해요.”라는 말을 먼저 합니다. 이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잘났기 때문에 못하는 거고, 잘나고 싶거나 잘 보이고 싶기 때문에 자유롭지가 못한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없거나 잘 보이고 싶지 않으면 “노래 한 곡 하세요.” 할 때 “예” 하고 노래하면 되는 거예요. “무슨 노래를 불러라, 어떻게 불러라, 잘 불러라.”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노래하라고 하는데도 우리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망설입니다. 길게 하라, 짧게 하란 얘기도 없으니 그냥 한 소절 부르고 들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내가 딴 건 잘하는데 노래에 자신이 없으면 이 노래로 인해 내 평가가 달라질 것 같아서 망설이는 거예요. 또 내가 평소에는 노래를 잘하는데 내 앞에 부른 사람이 아주 노래를 잘 불러버리면 안 부르려고 해요. 잘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부자유스러운 거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줄을 알면 자연스럽게 나가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노래하러 나가세요.” 하면 나가서 노래 부르고 사람들이 듣기 싫어서 “이제 그만 하세요” 하면 또 “예, 알겠습니다.” 하고 들어오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노래 못한다고 다섯 번쯤 빼던 사람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면 대부분은 그냥 평범한 노래를 안 부르고 옆에서 도와줄 수 없는, 모르는 노래나 가곡을 불러요.
이처럼 내가 남보다 잘나고 싶고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 인생이 피곤한 거예요.
결혼 생활도 그냥 둘이 같이 밥 먹고 살면 되는데, 영화나 소설처럼 아기자기하고 가슴이 늘 찌릿찌릿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상대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괴로워하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연애할 때는 두근거리기도 했는데 막상 결혼해서 살아보면 대화도 별로 없고 무미건조하다는 거지요. 그렇다고 남편이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고 아내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도 ‘연애할 때보다 대화도 별로 없고 무미건조하다. 결혼 생활이 이건 아니야.’라는 식이에요.
밥은 특별한 맛은 없지만 몸에는 좋고, 인스턴트식품은 입과 혀는 좋지만 건강을 해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결혼한 부부가 “우리 남편(아내)은 나를 끔찍이 사랑해. 나 없이는 못 살아.”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그것은 남편(아내)이 그어놓은 울타리 안에 갇힌 행복입니다. 울타리로부터 한 발만 밖으로 나가도 큰일 난 것처럼 불행이 닥쳐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장에 갇힌 새의 행복이에요. 진정한 행복도 아니고 자유도 아닙니다. 그래서 붓다가 남기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고 행복을 원한다면 마음을 이렇게 가볍게 가지기 바랍니다. 자기 스스로 삶을 행복하게 만들고 삶이 별 거 아닌 줄을 알면 도리어 삶이 위대해집니다. 이 진리를 알고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