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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에 부치는 편지 - 옛 선비의 풍류와 멋  구활 지음

"사랑하는 아들에게"
추석 연휴를 집에서 보내고 서울로 가는 길에 어머니께서 주신 책의 표지 안쪽에 쓰여 있었습니다. 책을 쓰신 구활 아저씨는 아버지 친구분이신데, 매일신문에서 일을 하셨던지라 어릴적에 입에 밴 '구기자 아저씨' 라고 부르는 게 전 더 편하기도 하네요.

이 책에는 풍류를 즐기며 살다 간 선조들의 얘기와 제가 보기엔 점점 그 분들을 닮아만 가는 구활아저씨의 생각들이 어울려 있습니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이 책을 척하니 펴들고 읽고 있으면 잠시나마 물 좋고 공기 좋은 정자에 온 듯한 기분이 듭니다. 특히 옛시조들의 구수한 말들이 정말 감칠 맛이 납니다. 걔중 하나를 소개해 드리면,

술 먹지 마자 하고 중한 맹세하였더니
잔 잡고 굽어보니 맹세 둥둥 술에 떴다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맹세 풀이하리라
-작자 미상-

책에서 소개된 작자 미상인 시조입니다. "맹세 둥둥 술에 떴다" 라니 어쩌면 말을 저렇게도 멋지게 할 수 있었을까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술 잔은 이미 손에 쥐어져 있더라 이거죠. 술 위에 둥둥 뜬 맹세를 한 입에 들이켜 버릴 모양입니다. 시조들이 하나같이 저렇게 멋들어지니, 따로 안주감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풍류란 게 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남녀간의 수작거는 모습도 시라는 형태를 거치면 멋들어지게 바뀝니다.

북처니 맑다커늘 우장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백호의 시 '한우가'

백호는 임제 선생의 호이고, 이 시는 한우라는 평양 기생에게 수작을 거는 시입니다. 여기에 대한 한우의 답시도 멋집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 베개와 비취 이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의 답시

이 책 한 권 덕분에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길이 아주 즐거웠습니다. 마치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여행이라도 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제 감상을 더 적고 싶지만 그것 보다는 머릿글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이 제 생각을 더 잘 나타낼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유머가 없고 풍류가 없다. 그러니까 기인이 없고 천재가 없다. 풍류와 기인이 없는 세상은 삭막할 수밖에 없다. 사막에는 군데군데 오아시스라도 있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는 물 한모금 편안하게 얻어 마실 쉼터가 없다. 이 건조한 세상에 신바람을 불어 넣을 궁리를 하다가 옛 선비들의 풍류와 멋을 들춰 재구성을 하면 한 줄기 시원한 비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렇게 글을 써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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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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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 Sung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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